포함/불포함 사항
- [관광] 관광지 입장료
- [교통] 전용차량
- [가이드/기사] 가이드 및 기사 경비
- [보험] 여행자 보험
- [기타] 개인 여행 경비 및 매너팁
- 개인 주류 및 음료수
전체 여행 동선
특전사항
여행 일정
길이 6.3km, 폭21.3m, 깊이 8m의 좁은 고린도 운하는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를 연결하는 운하로 세계 3대 운하인 수에즈운하와 파나마 운하 다음으로 꼽힌다. 역사에 따르면 로마지배시절, 네로황제에 의해 건설을 하려고 하였으나 완공은 1993년에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고린도 운하는 폭이 좁아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없고 높이가 6~70미터이다 보니 운하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며, 운하를 잇는 다리는 흔들다리여서 재미를 더한다. 현재는 관광객을 위해 유람선이 드나들며 번지점프도 즐길 수 있다.
B.C. 146년 로마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고대 도시국가를 B.C. 44년 로마 황제 시저가 재건한 로마 시대의 유적이다. 코린트시에서 약 8km 떨어진 아크로코린트 산기슭에 있다. 고린도 유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B.C. 6세기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건설한 아폴론 신전으로, 그리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 건축 당시에는 38개의 원주로 된 신전이었으나 현재는 7개의 원주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신전 남쪽에는 상점 등의 흔적이 있는 아고라가 있으며, 아고라에서 북쪽 레카이온 항구까지 이어진 레카이온 거리에는 배수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입구 근처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저 일족의 상 등 출토된 발굴품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아크로(Acro, 높은) 폴리스(Polis, 도시국가)는 고대 그리스 전역에 세워졌는데, 그 도시의 주신(主神)의 신전을 짓고 고대 그리스 도시의 방어용 요새와 같은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인해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델로스 동맹을 맺고, 그 중심 역할이 아테네로 이동하면서 방어와 종교적 중심축인 신전을 이곳 아크로폴리스에 건축하기에 이른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주요 유적들에는 니케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 에렉티온 신전 등이 있다.
수천년간 웅장한 자태로 아테네 시가지를 내려다 보며 지켜주는 수호신인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여신을 모시던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건축물로 도리아 양식의 건축물 중 최고로 꼽히며, 첫 번째 세계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유네스코를 상징하는 마크로도 쓰이고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진 공공 건축물로 로마 태생의 그리스 귀화 정치가인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 레길라를 추모하고자 건축하여 아테네 시미에게 기증한 곳이다. 아크로폴리스 남서 기슭에 있는 야외 음악당이자 극장으로 약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들에 있었던 열린 '회의의 장소'로 도시의 운동, 예술, 영혼, 정치적 삶의 중심지였다. 초기 그리스 시대에(BC 900-700년 경)에 고대 그리스의 시민으로 분류되던 자유민인 남성은 아고라에서 국방의 의무를 위해 모이거나, 왕, 의회의 통치의 발언을 듣곤 했다. 후기 그리스 시대에, 아고라는 상인들이 콜로네이드 아래에서 그들의 상품을 팔기 위한 노점, 상점 등을 운영하는 시장의 기능을 제공했다. 고대 아테네는 그들의 중심가에 큰 아고라가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아테네의 지배자인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히피아스 아래에서, 아고라는 약 600에서 750 야드의 열린 정사각형 공간으로 정리되었고, 웅장한 공공 건물들과 구분되었다.
843년 그리스 군사들과 시민들은 헌법을 요구하며 '궁전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를 계기로 1844년 그리스 공화국의 첫 헌법이 재정된다. 그리고 궁전광장은 '헌법'이란 의미의 그리스어가 붙어 '신타그마' 광장이 되었다. 아테네의 상징적인 지역이며 지하철과 시내버스 특히 공항버스가 지나 꼭 한 번은 지나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국회의사당 등 주요 건물이 몰려 있어 교통체증이 심하기도 하지만 맛집과 쇼핑지들이 많아 빠질 수 없는 관광지이다.
아르데토스 언덕에 있는 고대의 판 아테네 대축제가 열렸던 곳으로,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대회가 바로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
무명 용사의 비(Mnimio Aonostou Stratiotou)는 신타그마 광장 동쪽 아말리아스 거리 정면에 있습니다. 1923년 터키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비로, 앞에서는 전통의상을 입은 의장병둘이 30분마다 교대식을 합니다. 의장병이 신은 구두밑에는 징이 박혀있는데 걸을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나면서 희한한 폼으로 교대식을 합니다. 가만히 서있을 때는 옆에서 기념촬영도 가능합니다.
아크로폴리스와 고대 사원 인근의 산 중턱에 자리한 플라카는 좁은 자갈길을 따라 보석, 의류, 현지 도예품을 판매하는 자그마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친근한 느낌의 마을이다. 노천카페와 가족이 운영하는 타베르나는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며 씨네 파리스의 야외극장에서는 고전 영화를 상영한다. 근처의 아나피오티카 지역은 그리스의 섬을 떠올리게 하는 흰색 집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신전으로, 올림포스 12신 중 최고신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6세기, 참주 정치의 아테네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고대 세계 최대급인 성전은 완성시킬 수 없었고 성전의 완성은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로마 제국 시대를 통해 지어진 성전에서 이 성전은 최대의 것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의 메테오라이다. 바다 속 기암군이 형성되어 만들어진 지역이다. 11세기 이후, 중세 수도사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수련장소를 찾다가 메테오라 지역의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위에 24개의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오스만투르크의 그리스 점령 속에서도 종교 전통과 헬레니즘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근원이 된 곳이다. 이 아름다운 메테오라 수도원들의 경관은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로마군이 페르시아군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303년에 세운 개선문이다.
데살로니키의 랜드마크이며 높이 30m 정도로 15세기에 베니치아인이 세운 도성의 일부입니다. 터키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당시 이곳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져 '피로 물든 탑'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그 후 탑의 표면을 하얗게 칠하면서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도바울에게 헌정된 장엄한 교회로 사도바울의 성수 바로 위에 있는 테살로니키의 Aghios Pavlos 지구에 세워져 있다.
두아다라에서 온 루디아의 여인이 회심한 후 바울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머물게 하니 바울의 유럽 전도의 교두보요 교회가 되었다.(행16:15) 루디아의 여인은 자주빛 염료의 생산과 사업으로 유명하였고, 자주 사업으로 빌립보에 와 있었다. 당시 자색옷감은 페니키아 연안에서 채취한 뿔고둥에서 염료를 얻어 염색을 했는데 염색과정이 복잡하고 힘들어 가격이 엄청 높아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 여기서 루디아의 여인이 부자였다고 추정된다. 마케도냐와 유럽에서 최초의 회심자가 된 여인! 이를 기념하여 동방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5월 20일을 루디아의 축일로 정했는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건축했다고 한다. 입구와 바닥, 천장에 이르기까지 성화가 화려하다. 교회 돔에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형상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사도바울과 루디아상, 예수님이 세례받는 장면과 여러 가지 성화를 볼 수 있다. 근처에 바울이 세례를 베푼 강과 세례를 주던 곳이 물고기 모양의 세례터로 만들어 놓았다. 기념교회 입구 바닥에는 바울의 전도여행지가 지도모양으로 모자이크 되어져있다.
아볼로니아 라는 말은 아폴로에게 속한 곳이라는 뜻으로, 암비볼리 서쪽 약 45㎞, 테살로니키 동쪽 약 60㎞ 지점에 있다. 오늘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지나면서 복음을 전한 장소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더불어 바위 위에서 바울이 전도했다는 바위(비마)가 있으며, 이 바위에는 행17:1의 말씀이 새겨진 대리석판을 붙여 놓았다.
빌립보는 고대 로마의 식민 도시였으며 사도 바울이 유럽 지역에서 행했던 최초의 선교 관문 도시로, 정치와 경제 및 문화와 종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집안에 세례를 베풀어 유럽 최초의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현재 빌립보에는 사도 바울이 갇혀있던 감옥 등 유적만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바울의 첫 번쨰 유럽 선교도시>> 바울과 실라가 2차 선교 여행시에 이곳에 첫발을 디뎌 구라파 전도의 문 을 여는 첫 발이 되었다. 그 쳔 열매의 교인이 자주 장사하는 루디아라는 여신도다(행 16:14).
‘신도시’란 뜻으로, 오늘날 ‘카발라’(kavalla)로 불리는 그리스 소도시이다. 터키 드로아 항구에서 바닷길로 185KM, 빌립보 까지 16KM 거리에 있는 항구이다. 비잔틴 시대 당시 네압볼리는 크리스토우폴리스라고 불려졌으며, 터키의 통치 시대부터는 카발라로 변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사도 바울 일행이 2차 선교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 당도한 첫 번째 성읍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는 바울의 네압볼리 도착을 기리는 두 곳의 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트로야·트로이아라고도 한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리오스’라고 불렸다.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렀다)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을 발굴하면서 유적이 밝혀졌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 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그러나 그후 슐리만을 도운 독일의 고고학자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제6층에 해당하는 곳이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하였다(BC 15∼BC 12). 1930년대에 와서 미국의 블레겐이 다시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한 층 위인 제7층 A를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제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제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移民)한 아르카이크시대의 것이며, 맨 위층인 제9층은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이 무렵 도시는 ‘일리움’이라고 불리었다. 이 시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트로이 유적은 다르다넬로스 해협 남쪽 쿠체크, 멘데레스강에 접한 비옥한 평야와 히사르릭 언덕 사이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BC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트로이 Ⅰ기는 약 500년간 이어지다가 화재로 멸망했고 트로이 Ⅱ기는 대규모 훌륭한 거리가 있었으나 역시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이어지는 Ⅲ Ⅳ Ⅴ기 시대는 특별한 변화나 진전이 없었고 트로이 Ⅳ기에 이르러 인구도 늘고 꽤 번영했던 것을 볼수 있다. 하지만 지진으로 멸망하고 곧이어 재건된 트로이 Ⅵ기에 이르러 인구도 늘고 꽤 번영했던 것을 볼수있다. 하지만 지진으로 멸망하고 곧이어 재건된 트로이 Ⅶ기가 바로 트로이 전쟁 영웅들의 무대였다. 그후 오랫동안 정체시기가 계속된 후 BC700년경 유적터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최후의 트로이 Ⅸ기는 헬레니즘시대 부터 로마시대에 이르지만 쇠퇴하여 5세기에는 역사속에 묻혀버리게 되었다. 1870년 슐리만은 주위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전설속의 트로이를 발굴하기 시작 그 사후에도 작업은 계속되어 9개층에서 도시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발굴을 통해 금 세공품들이 나옴으로 써 트로이의 문화가 발전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발릭은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 숲 가운데 있는 매력적인 항구 도시이자 에게해의 인기있는 휴양 도시이다. 나무와 돌들로 장식되어 있는 집들은 도시의 외관을 아름답게 하며, 아이발릭 근교에는 많은 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Cunda섬은 가장 유명하다.
"네가 어디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이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2:13~14) 엣 성채 한 모퉁이에 남아있는 교회로 이 건물은 본래 이집트의 세라피스신전으로 사용되던 것을 비잔틴 제국 당시 버가모 교회로 사용하였다.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고대 의료센터였던 아스클레피온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기리는 신전을 중심으로 현대의 종합병원격이라 할수 있다. 입구의 벽에는 '죽음은 이곳에 들어오지말것'이라고 쓰여있으며, 아스클레피온으로 들어가려면 원기둥이 즐비하게 서있는 비아덱타(Via Tecta)라는 길을 지나 뱀의 기둥을 보게돤다. 뱀은 허물을 벗기때문에 생명과 소생을 의미하며 아직까지도 세계보건기구(WHO)를 포함한 의학관련 분야에서는 휘장과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온천욕과 냉수욕 시설과 심리치료, 식이요법, 약물치료, 환자들을 위한 정원과 도서관, 음악 공연 대극장 등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가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19~20) 이즈미르(서머나) 북동쪽으로 105Km 악세르 호수 남쪽에 있는 이 교회터에는 석축 기둥과 담장만 남아있다.
쿠사다시는 중부 에게해의 휴양도시로 에페스가 항구도시로 기능이 다하자 상대적으로 발달한 곳이다. 해적성이 있는 비둘기 섬과 빛나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을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계단상으로 세워진 마을에서는 아름다운 에게해가 한눈에 들어와 방문객들에게 감탄을 사고 있으며, 에게해 섬들을 유람하는 크루즈의 중요 기항지로 중요한 역활을 하여 오늘날 터키 서부 해안 최대의 휴양지가 되었으며, 여름 휴가철에는 약 1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교회 사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37년~42년 사이에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데 사도요한은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에베소로 왔다고 한다. 이때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와서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그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축 되었다.
에페소 유적의 대표적인 유적 격으로 135년 줄리우스 이퀼라가 그의 아버지인 셀수스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셀수스는 당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해 통치하였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서관은 많은 부분 무너졌지만 외벽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으며 벽에는 화려한 문양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리저리 연결된 도서관의 지하가 홍등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2세기 경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건물은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손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입구에 있는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테네, 아폴로신등 여러 신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데오도시우스 황제와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볼지어다 내가 네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때라. (계3:8~10)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화산으로 인해 두개의 육중한 돌기둥과 주초만 양상하게 남아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빌라델비아는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도시대에 살고 있었다. 폴리갑이 순교할때 빌라델비아의 성도 10명이 순교하였고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이곳 성도들은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이들의 신앙을 뜨겁게 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성전의 기둥이 되게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어떻게 받았으며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2~3) 둥근담과 아치형 창문이 교회, 뒷쪽에 거대한 돌기둥만 남아 있는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폐허이다. 사데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만들어진 곳이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물질문화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였다
석회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 기원전 1세기 페르가몬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서 도시로 세워졌다. 도시로 세워지기 전 이곳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제의적인 장소로 여겨졌고 일찍부터 이곳에는 성소가 있었다. '성스러운 도시'를 뜻하는 히에라 폴리스는 치료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로써 로마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번성했으나 14세기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직조업이 크게 발달하여 양털기술자, 카페트 직조자, 염색기술자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카페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더보기
파묵칼레는 목화솜으로 이루어진 성이란 뜻으로 도시는 온통 눈이 내린것 같이 새하얀 모습이다. 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내리면서 층층이 바위를 지금의 하얀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역사적으로도 치유와 휴양을 위해 많은 위인들이 방문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관광객과 지나친 개발로 온천수가 줄어들어 터키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계획성을 갖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성경(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칭 부요한 사람’이라 할 정도로 부하여 하나님까지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또 그곳에서 생산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의복을 자랑했지만, 주님은 벌거벗은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과신했지만, 주님은 정작 자신들이 눈먼 줄 모르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라오디게아로 흘러오는 물 같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렇듯 멋지고, 아름답고, 부유했던 삶을 산 라오디게아에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 교회 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잘나가던 라오디게아가 폐허로 남게 된 것은 거듭되는 자연 재해와 대형 지진 때문입니다. 1710년과 1899년 대지진 때 이곳은 완전히 파괴됐고, 현재 복원되지 않은 채 폐허 속에 로마식 야외운동장과 원형극장 터, 그리고 폐허 속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돌무더기가 교회 터로 추정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셀류쿠스가 왕조를 세우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를 기념하기 위해 헬라 제국 내에 16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모두 안디옥이라 하였다. 성경에는 안디옥이라는 지명으로 두 군데가 등장하는데,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니골라의 고향이자 이방 땅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안디옥은 시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수리아 지방에 있으며, 터키의 중서부에 있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지의 한 곳이었던 안디옥은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과 구별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불립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현재 지명은 얄바츠(Yalvac)로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그들을 쫓아냈다. 사도 바울은 2차 3차 선교여행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을 방문하였으며, 비시디아 안디옥의 발굴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9년에 본격적으로 재개되어 로마시대의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신전, 야외극장, 비잔틴 시대에 지은 사도 바울 기념교회 등을 꼽을 수 있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은 괴뢰메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입니다.
기원전 200년경에도 이 지하도시의 이야기가 거론될 정도로 역사가 깊은 카파도키아에는 여러개의 지하도시가 있다. 마치 개미집을 연상하듯이 조그만 구멍을 통해 지하로 들어가면 여러개의 방과 층으로 이뤄져있어 길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복잡하다. 네브쉐히르에서 남쪽으로 2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카이마크르 지하도시는 지하 8층 깊이까지 굴이 파져있다. 이곳에는 침실과 거실, 부엌, 창고 등이 갖춰져 있으며 가축을 기르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다. 좁고 긴 통로의 한쪽에는 외부로부터 침입자가 들어왔을때 공간을 폐쇄할 수 있도록 둥근 원형을 돌 칸막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뾰족한 성채"를 의미하는 이곳은 커다란 바위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여러 바위산이 모여 있어서 견고한 요새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 있다. 지진으로 만들어졌으며 실제 주거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다. 평범한 바위산에 들어선 집들이 예술품처럼 아름다우며 뛰어난 '괴레메' 골짜기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우치히사르는 카파도키아 일대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로써, 이곳에서 둘러보면 괴뢰메는 물론 주변의 마을과 멀리는 눈 덮인 산도 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 괴레메까지의 길은 기암괴석의 장관이 펼쳐있다.
괴레메와 아바노스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파샤바계곡은 버섯모양을한 바위들로 형성된 계곡이다. 화산활동과 비바람으로 모양이 형성되었고 바위의 모습은 각 지층마다 경도와 성분이 다르기에 현재의 모습처럼 다르게 깎여있다. 고대 수도사 성 시메온이 이 곳에 살았기때문에 기독교적으로 수도사의 골짜기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하나의 몸통에 세개의 봉우리가 있는 세 쌍둥이 버섯 바위가 있는데 이 곳의 대표적인 기둥이며 삼위일체 바위라고도 불린다.
터키 이스탄불 서쪽에 위치한 히포드롬 광장은 로마시대 대경기장 유적지였다. 196년 로마 황제 세비루스가 검투 경기장으로 건설했으나 4세기 무렵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마차 경기장으로 변경하였고 오늘날 세로 500m, 가로 117m의 u자형 경기장을 광장으로 활용하여 아트 메이단(말의광장)이라 불리며 터키인들의 축제장소와 안락한 휴식공간이 되어있다. 히포드롬 광장에는 이집트의 가르나크 신전에서로마 황제가 가져온 고대 이집트의 돌기둥 기념비인 '오벨리스크'와 콘스탄티누스 7세가 건립한 '콘스탄티누스 탑'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가져온 세마리의 뱀조각 '청동 뱀기둥' 이 있다.
17세기 천하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세계 곳곳에서 거둬들인 진기한 보물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헌상품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골든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의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양식을 가진 궁전으로서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강대한 권력을 가졌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성이다.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던 36명의 술탄 중에서 반 정도가 톱카프 궁전을 사용 했다고 한다. 궁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다. 의사당이나 술탄의 거실은 물론 왕실의 여인들이 거처했던 하렘은 더욱 흥미롭다. 제 2정원의 오른쪽에는 굴뚝이 딸린 큰 부엌이 자리잡고 있는데 천장이 돔으로 된 10개의 큰 방과 28개의 굴뚝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 했음을 알수 있다.
성 소피아 사원(아야 소피아)은 톱카프 궁전 앞에 있는 적갈색의 건물로 동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인 성당이었다. 그 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점령하여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사원의 내부에는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는 다수의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 있는데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벽화나 휴스티아누스 대제가 화려하게 묘사된 그리스도 좌상은 특히 유명하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벽화는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모두 옻칠로 가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첨탑과 미흐라브(Mihrab, 메카의 방향으로 움풀 패인 곳)가 더해져 이슬람교 사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1931년 미국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숨겨진 벽 안의 모자이크화가 발견된 후 성 소피아 사원은 비잔틴 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또 다시 각광으로 받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상징인 블루모스크는 내부를 가득 채운 푸른빛의 이즈닉 타일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계적인 명소입니다. 6개의 우아한 첨탑과 거대한 돔이 어우러져 비잔틴과 오스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이슬람의 경건함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매혹적인 여행지입니다.
비잔틴 제국시절 이스탄불지역의 물 공급을 위해 만든 지하 저수지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어 '지하궁전'으로도 불린다. 기둥의 하단부는 1885년 보수공사를 하며 발견된 메두사의 머리 조각상이다.
터키/그리스성지순례 12일
여행 주요 정보
| 여행 기간 | 2026.08.26(수) ~ 2026.09.06(일) (11박 12일) |
|---|---|
| 이동수단 | 전용 차량 |
| 출발 장소 | 서울출발[추후지정] |
| 여행인원 | 성인 1명 / 아동 0명 / 유아 0명 |
| 인솔자 및 가이드 | 인솔자 미정 (기사 경비 및 톨게이트 비용 포함) |
| 여행 도시 | 서울도/서울특별, 파주, 양천, 용산 |
포함/불포함 사항
- [관광] 관광지 입장료
- [교통] 전용차량
- [가이드/기사] 가이드 및 기사 경비
- [보험] 여행자 보험
- [기타] 개인 여행 경비 및 매너팁
- 개인 주류 및 음료수
전체 여행 동선
상세 여행 일정
길이 6.3km, 폭21.3m, 깊이 8m의 좁은 고린도 운하는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를 연결하는 운하로 세계 3대 운하인 수에즈운하와 파나마 운하 다음으로 꼽힌다. 역사에 따르면 로마지배시절, 네로황제에 의해 건설을 하려고 하였으나 완공은 1993년에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고린도 운하는 폭이 좁아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없고 높이가 6~70미터이다 보니 운하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며, 운하를 잇는 다리는 흔들다리여서 재미를 더한다. 현재는 관광객을 위해 유람선이 드나들며 번지점프도 즐길 수 있다.
B.C. 146년 로마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고대 도시국가를 B.C. 44년 로마 황제 시저가 재건한 로마 시대의 유적이다. 코린트시에서 약 8km 떨어진 아크로코린트 산기슭에 있다. 고린도 유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B.C. 6세기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건설한 아폴론 신전으로, 그리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 건축 당시에는 38개의 원주로 된 신전이었으나 현재는 7개의 원주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신전 남쪽에는 상점 등의 흔적이 있는 아고라가 있으며, 아고라에서 북쪽 레카이온 항구까지 이어진 레카이온 거리에는 배수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입구 근처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저 일족의 상 등 출토된 발굴품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아크로(Acro, 높은) 폴리스(Polis, 도시국가)는 고대 그리스 전역에 세워졌는데, 그 도시의 주신(主神)의 신전을 짓고 고대 그리스 도시의 방어용 요새와 같은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인해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델로스 동맹을 맺고, 그 중심 역할이 아테네로 이동하면서 방어와 종교적 중심축인 신전을 이곳 아크로폴리스에 건축하기에 이른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주요 유적들에는 니케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 에렉티온 신전 등이 있다.
수천년간 웅장한 자태로 아테네 시가지를 내려다 보며 지켜주는 수호신인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여신을 모시던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건축물로 도리아 양식의 건축물 중 최고로 꼽히며, 첫 번째 세계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유네스코를 상징하는 마크로도 쓰이고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진 공공 건축물로 로마 태생의 그리스 귀화 정치가인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 레길라를 추모하고자 건축하여 아테네 시미에게 기증한 곳이다. 아크로폴리스 남서 기슭에 있는 야외 음악당이자 극장으로 약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들에 있었던 열린 '회의의 장소'로 도시의 운동, 예술, 영혼, 정치적 삶의 중심지였다. 초기 그리스 시대에(BC 900-700년 경)에 고대 그리스의 시민으로 분류되던 자유민인 남성은 아고라에서 국방의 의무를 위해 모이거나, 왕, 의회의 통치의 발언을 듣곤 했다. 후기 그리스 시대에, 아고라는 상인들이 콜로네이드 아래에서 그들의 상품을 팔기 위한 노점, 상점 등을 운영하는 시장의 기능을 제공했다. 고대 아테네는 그들의 중심가에 큰 아고라가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아테네의 지배자인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히피아스 아래에서, 아고라는 약 600에서 750 야드의 열린 정사각형 공간으로 정리되었고, 웅장한 공공 건물들과 구분되었다.
843년 그리스 군사들과 시민들은 헌법을 요구하며 '궁전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를 계기로 1844년 그리스 공화국의 첫 헌법이 재정된다. 그리고 궁전광장은 '헌법'이란 의미의 그리스어가 붙어 '신타그마' 광장이 되었다. 아테네의 상징적인 지역이며 지하철과 시내버스 특히 공항버스가 지나 꼭 한 번은 지나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국회의사당 등 주요 건물이 몰려 있어 교통체증이 심하기도 하지만 맛집과 쇼핑지들이 많아 빠질 수 없는 관광지이다.
아르데토스 언덕에 있는 고대의 판 아테네 대축제가 열렸던 곳으로,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대회가 바로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
무명 용사의 비(Mnimio Aonostou Stratiotou)는 신타그마 광장 동쪽 아말리아스 거리 정면에 있습니다. 1923년 터키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비로, 앞에서는 전통의상을 입은 의장병둘이 30분마다 교대식을 합니다. 의장병이 신은 구두밑에는 징이 박혀있는데 걸을 때마다 '딱딱' 소리가 나면서 희한한 폼으로 교대식을 합니다. 가만히 서있을 때는 옆에서 기념촬영도 가능합니다.
아크로폴리스와 고대 사원 인근의 산 중턱에 자리한 플라카는 좁은 자갈길을 따라 보석, 의류, 현지 도예품을 판매하는 자그마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친근한 느낌의 마을이다. 노천카페와 가족이 운영하는 타베르나는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며 씨네 파리스의 야외극장에서는 고전 영화를 상영한다. 근처의 아나피오티카 지역은 그리스의 섬을 떠올리게 하는 흰색 집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신전으로, 올림포스 12신 중 최고신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기원전 6세기, 참주 정치의 아테네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고대 세계 최대급인 성전은 완성시킬 수 없었고 성전의 완성은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로마 제국 시대를 통해 지어진 성전에서 이 성전은 최대의 것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의 메테오라이다. 바다 속 기암군이 형성되어 만들어진 지역이다. 11세기 이후, 중세 수도사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수련장소를 찾다가 메테오라 지역의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위에 24개의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오스만투르크의 그리스 점령 속에서도 종교 전통과 헬레니즘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근원이 된 곳이다. 이 아름다운 메테오라 수도원들의 경관은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로마군이 페르시아군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303년에 세운 개선문이다.
데살로니키의 랜드마크이며 높이 30m 정도로 15세기에 베니치아인이 세운 도성의 일부입니다. 터키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당시 이곳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져 '피로 물든 탑'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그 후 탑의 표면을 하얗게 칠하면서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도바울에게 헌정된 장엄한 교회로 사도바울의 성수 바로 위에 있는 테살로니키의 Aghios Pavlos 지구에 세워져 있다.
두아다라에서 온 루디아의 여인이 회심한 후 바울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머물게 하니 바울의 유럽 전도의 교두보요 교회가 되었다.(행16:15) 루디아의 여인은 자주빛 염료의 생산과 사업으로 유명하였고, 자주 사업으로 빌립보에 와 있었다. 당시 자색옷감은 페니키아 연안에서 채취한 뿔고둥에서 염료를 얻어 염색을 했는데 염색과정이 복잡하고 힘들어 가격이 엄청 높아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 여기서 루디아의 여인이 부자였다고 추정된다. 마케도냐와 유럽에서 최초의 회심자가 된 여인! 이를 기념하여 동방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5월 20일을 루디아의 축일로 정했는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건축했다고 한다. 입구와 바닥, 천장에 이르기까지 성화가 화려하다. 교회 돔에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형상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사도바울과 루디아상, 예수님이 세례받는 장면과 여러 가지 성화를 볼 수 있다. 근처에 바울이 세례를 베푼 강과 세례를 주던 곳이 물고기 모양의 세례터로 만들어 놓았다. 기념교회 입구 바닥에는 바울의 전도여행지가 지도모양으로 모자이크 되어져있다.
아볼로니아 라는 말은 아폴로에게 속한 곳이라는 뜻으로, 암비볼리 서쪽 약 45㎞, 테살로니키 동쪽 약 60㎞ 지점에 있다. 오늘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지나면서 복음을 전한 장소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더불어 바위 위에서 바울이 전도했다는 바위(비마)가 있으며, 이 바위에는 행17:1의 말씀이 새겨진 대리석판을 붙여 놓았다.
빌립보는 고대 로마의 식민 도시였으며 사도 바울이 유럽 지역에서 행했던 최초의 선교 관문 도시로, 정치와 경제 및 문화와 종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집안에 세례를 베풀어 유럽 최초의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현재 빌립보에는 사도 바울이 갇혀있던 감옥 등 유적만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바울의 첫 번쨰 유럽 선교도시>> 바울과 실라가 2차 선교 여행시에 이곳에 첫발을 디뎌 구라파 전도의 문 을 여는 첫 발이 되었다. 그 쳔 열매의 교인이 자주 장사하는 루디아라는 여신도다(행 16:14).
‘신도시’란 뜻으로, 오늘날 ‘카발라’(kavalla)로 불리는 그리스 소도시이다. 터키 드로아 항구에서 바닷길로 185KM, 빌립보 까지 16KM 거리에 있는 항구이다. 비잔틴 시대 당시 네압볼리는 크리스토우폴리스라고 불려졌으며, 터키의 통치 시대부터는 카발라로 변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사도 바울 일행이 2차 선교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 당도한 첫 번째 성읍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는 바울의 네압볼리 도착을 기리는 두 곳의 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트로야·트로이아라고도 한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리오스’라고 불렸다.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렀다)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을 발굴하면서 유적이 밝혀졌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 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그러나 그후 슐리만을 도운 독일의 고고학자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제6층에 해당하는 곳이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하였다(BC 15∼BC 12). 1930년대에 와서 미국의 블레겐이 다시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한 층 위인 제7층 A를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제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제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移民)한 아르카이크시대의 것이며, 맨 위층인 제9층은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이 무렵 도시는 ‘일리움’이라고 불리었다. 이 시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트로이 유적은 다르다넬로스 해협 남쪽 쿠체크, 멘데레스강에 접한 비옥한 평야와 히사르릭 언덕 사이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BC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트로이 Ⅰ기는 약 500년간 이어지다가 화재로 멸망했고 트로이 Ⅱ기는 대규모 훌륭한 거리가 있었으나 역시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이어지는 Ⅲ Ⅳ Ⅴ기 시대는 특별한 변화나 진전이 없었고 트로이 Ⅳ기에 이르러 인구도 늘고 꽤 번영했던 것을 볼수 있다. 하지만 지진으로 멸망하고 곧이어 재건된 트로이 Ⅵ기에 이르러 인구도 늘고 꽤 번영했던 것을 볼수있다. 하지만 지진으로 멸망하고 곧이어 재건된 트로이 Ⅶ기가 바로 트로이 전쟁 영웅들의 무대였다. 그후 오랫동안 정체시기가 계속된 후 BC700년경 유적터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최후의 트로이 Ⅸ기는 헬레니즘시대 부터 로마시대에 이르지만 쇠퇴하여 5세기에는 역사속에 묻혀버리게 되었다. 1870년 슐리만은 주위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전설속의 트로이를 발굴하기 시작 그 사후에도 작업은 계속되어 9개층에서 도시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발굴을 통해 금 세공품들이 나옴으로 써 트로이의 문화가 발전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발릭은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 숲 가운데 있는 매력적인 항구 도시이자 에게해의 인기있는 휴양 도시이다. 나무와 돌들로 장식되어 있는 집들은 도시의 외관을 아름답게 하며, 아이발릭 근교에는 많은 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Cunda섬은 가장 유명하다.
"네가 어디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이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2:13~14) 엣 성채 한 모퉁이에 남아있는 교회로 이 건물은 본래 이집트의 세라피스신전으로 사용되던 것을 비잔틴 제국 당시 버가모 교회로 사용하였다.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고대 의료센터였던 아스클레피온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기리는 신전을 중심으로 현대의 종합병원격이라 할수 있다. 입구의 벽에는 '죽음은 이곳에 들어오지말것'이라고 쓰여있으며, 아스클레피온으로 들어가려면 원기둥이 즐비하게 서있는 비아덱타(Via Tecta)라는 길을 지나 뱀의 기둥을 보게돤다. 뱀은 허물을 벗기때문에 생명과 소생을 의미하며 아직까지도 세계보건기구(WHO)를 포함한 의학관련 분야에서는 휘장과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온천욕과 냉수욕 시설과 심리치료, 식이요법, 약물치료, 환자들을 위한 정원과 도서관, 음악 공연 대극장 등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가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19~20) 이즈미르(서머나) 북동쪽으로 105Km 악세르 호수 남쪽에 있는 이 교회터에는 석축 기둥과 담장만 남아있다.
쿠사다시는 중부 에게해의 휴양도시로 에페스가 항구도시로 기능이 다하자 상대적으로 발달한 곳이다. 해적성이 있는 비둘기 섬과 빛나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을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계단상으로 세워진 마을에서는 아름다운 에게해가 한눈에 들어와 방문객들에게 감탄을 사고 있으며, 에게해 섬들을 유람하는 크루즈의 중요 기항지로 중요한 역활을 하여 오늘날 터키 서부 해안 최대의 휴양지가 되었으며, 여름 휴가철에는 약 1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교회 사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37년~42년 사이에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데 사도요한은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에베소로 왔다고 한다. 이때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와서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그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축 되었다.
에페소 유적의 대표적인 유적 격으로 135년 줄리우스 이퀼라가 그의 아버지인 셀수스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셀수스는 당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해 통치하였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서관은 많은 부분 무너졌지만 외벽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으며 벽에는 화려한 문양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리저리 연결된 도서관의 지하가 홍등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2세기 경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건물은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손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입구에 있는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테네, 아폴로신등 여러 신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데오도시우스 황제와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볼지어다 내가 네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때라. (계3:8~10)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화산으로 인해 두개의 육중한 돌기둥과 주초만 양상하게 남아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빌라델비아는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도시대에 살고 있었다. 폴리갑이 순교할때 빌라델비아의 성도 10명이 순교하였고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이곳 성도들은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이들의 신앙을 뜨겁게 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성전의 기둥이 되게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어떻게 받았으며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2~3) 둥근담과 아치형 창문이 교회, 뒷쪽에 거대한 돌기둥만 남아 있는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폐허이다. 사데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만들어진 곳이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물질문화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였다
석회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 기원전 1세기 페르가몬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서 도시로 세워졌다. 도시로 세워지기 전 이곳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제의적인 장소로 여겨졌고 일찍부터 이곳에는 성소가 있었다. '성스러운 도시'를 뜻하는 히에라 폴리스는 치료휴양의 도시이자 상업의 도시로써 로마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번성했으나 14세기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직조업이 크게 발달하여 양털기술자, 카페트 직조자, 염색기술자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카페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더보기
파묵칼레는 목화솜으로 이루어진 성이란 뜻으로 도시는 온통 눈이 내린것 같이 새하얀 모습이다. 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내리면서 층층이 바위를 지금의 하얀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역사적으로도 치유와 휴양을 위해 많은 위인들이 방문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관광객과 지나친 개발로 온천수가 줄어들어 터키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계획성을 갖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성경(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칭 부요한 사람’이라 할 정도로 부하여 하나님까지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또 그곳에서 생산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의복을 자랑했지만, 주님은 벌거벗은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과신했지만, 주님은 정작 자신들이 눈먼 줄 모르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신앙이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라오디게아로 흘러오는 물 같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렇듯 멋지고, 아름답고, 부유했던 삶을 산 라오디게아에는, 몇 차례의 대규모 지진으로 현재 교회 터로 볼 수 있는 유적 하나와 야외극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잘나가던 라오디게아가 폐허로 남게 된 것은 거듭되는 자연 재해와 대형 지진 때문입니다. 1710년과 1899년 대지진 때 이곳은 완전히 파괴됐고, 현재 복원되지 않은 채 폐허 속에 로마식 야외운동장과 원형극장 터, 그리고 폐허 속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돌무더기가 교회 터로 추정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셀류쿠스가 왕조를 세우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를 기념하기 위해 헬라 제국 내에 16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모두 안디옥이라 하였다. 성경에는 안디옥이라는 지명으로 두 군데가 등장하는데,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니골라의 고향이자 이방 땅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안디옥은 시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수리아 지방에 있으며, 터키의 중서부에 있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지의 한 곳이었던 안디옥은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과 구별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불립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현재 지명은 얄바츠(Yalvac)로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그들을 쫓아냈다. 사도 바울은 2차 3차 선교여행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을 방문하였으며, 비시디아 안디옥의 발굴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9년에 본격적으로 재개되어 로마시대의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아우구스투스 신전, 야외극장, 비잔틴 시대에 지은 사도 바울 기념교회 등을 꼽을 수 있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은 괴뢰메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입니다.
기원전 200년경에도 이 지하도시의 이야기가 거론될 정도로 역사가 깊은 카파도키아에는 여러개의 지하도시가 있다. 마치 개미집을 연상하듯이 조그만 구멍을 통해 지하로 들어가면 여러개의 방과 층으로 이뤄져있어 길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복잡하다. 네브쉐히르에서 남쪽으로 2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카이마크르 지하도시는 지하 8층 깊이까지 굴이 파져있다. 이곳에는 침실과 거실, 부엌, 창고 등이 갖춰져 있으며 가축을 기르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다. 좁고 긴 통로의 한쪽에는 외부로부터 침입자가 들어왔을때 공간을 폐쇄할 수 있도록 둥근 원형을 돌 칸막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뾰족한 성채"를 의미하는 이곳은 커다란 바위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여러 바위산이 모여 있어서 견고한 요새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 있다. 지진으로 만들어졌으며 실제 주거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다. 평범한 바위산에 들어선 집들이 예술품처럼 아름다우며 뛰어난 '괴레메' 골짜기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우치히사르는 카파도키아 일대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로써, 이곳에서 둘러보면 괴뢰메는 물론 주변의 마을과 멀리는 눈 덮인 산도 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 괴레메까지의 길은 기암괴석의 장관이 펼쳐있다.
괴레메와 아바노스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파샤바계곡은 버섯모양을한 바위들로 형성된 계곡이다. 화산활동과 비바람으로 모양이 형성되었고 바위의 모습은 각 지층마다 경도와 성분이 다르기에 현재의 모습처럼 다르게 깎여있다. 고대 수도사 성 시메온이 이 곳에 살았기때문에 기독교적으로 수도사의 골짜기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하나의 몸통에 세개의 봉우리가 있는 세 쌍둥이 버섯 바위가 있는데 이 곳의 대표적인 기둥이며 삼위일체 바위라고도 불린다.
터키 이스탄불 서쪽에 위치한 히포드롬 광장은 로마시대 대경기장 유적지였다. 196년 로마 황제 세비루스가 검투 경기장으로 건설했으나 4세기 무렵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마차 경기장으로 변경하였고 오늘날 세로 500m, 가로 117m의 u자형 경기장을 광장으로 활용하여 아트 메이단(말의광장)이라 불리며 터키인들의 축제장소와 안락한 휴식공간이 되어있다. 히포드롬 광장에는 이집트의 가르나크 신전에서로마 황제가 가져온 고대 이집트의 돌기둥 기념비인 '오벨리스크'와 콘스탄티누스 7세가 건립한 '콘스탄티누스 탑'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가져온 세마리의 뱀조각 '청동 뱀기둥' 이 있다.
17세기 천하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세계 곳곳에서 거둬들인 진기한 보물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헌상품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골든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의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양식을 가진 궁전으로서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강대한 권력을 가졌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성이다.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던 36명의 술탄 중에서 반 정도가 톱카프 궁전을 사용 했다고 한다. 궁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다. 의사당이나 술탄의 거실은 물론 왕실의 여인들이 거처했던 하렘은 더욱 흥미롭다. 제 2정원의 오른쪽에는 굴뚝이 딸린 큰 부엌이 자리잡고 있는데 천장이 돔으로 된 10개의 큰 방과 28개의 굴뚝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 했음을 알수 있다.
성 소피아 사원(아야 소피아)은 톱카프 궁전 앞에 있는 적갈색의 건물로 동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인 성당이었다. 그 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점령하여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사원의 내부에는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는 다수의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 있는데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벽화나 휴스티아누스 대제가 화려하게 묘사된 그리스도 좌상은 특히 유명하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벽화는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모두 옻칠로 가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첨탑과 미흐라브(Mihrab, 메카의 방향으로 움풀 패인 곳)가 더해져 이슬람교 사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1931년 미국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숨겨진 벽 안의 모자이크화가 발견된 후 성 소피아 사원은 비잔틴 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또 다시 각광으로 받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상징인 블루모스크는 내부를 가득 채운 푸른빛의 이즈닉 타일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계적인 명소입니다. 6개의 우아한 첨탑과 거대한 돔이 어우러져 비잔틴과 오스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이슬람의 경건함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매혹적인 여행지입니다.
비잔틴 제국시절 이스탄불지역의 물 공급을 위해 만든 지하 저수지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어 '지하궁전'으로도 불린다. 기둥의 하단부는 1885년 보수공사를 하며 발견된 메두사의 머리 조각상이다.